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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궁전 중 하나인 베르사유, 웅장하고 기품 있는 이 궁전은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유산입니다. 건설 목적도 왕권을 과시하는 것이었죠. 현대 들어와서도 이곳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만찬장으로 활용됐습니다. 손님은 대부분 프랑스 대통령이 초청한 외국 정상들이었죠.
무대입니다. 화려한 무대죠.
베르사유는 고위급 정치, 외교행사에 이상적인 곳입니다.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최고의 장소입니다. 혁명으로 왕정을 무너뜨렸던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상징인 베르사유 궁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은 300여 년 전 태양왕 루이 14세가 남긴 이 유산을 어떻게 활용해왔을까요?
2014년 3월 프랑스 대통령 프랑소와 올랑드(François Hollande)는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초청했습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는 절대왕정의 화려한 유물로 세계 2위 경제대국 최고지도자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죠.
2014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이 프랑스를 국빈 방문했을 때 당시 시진핑은 프랑스 측에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베르사유 궁전의 화려함을 한껏 과시했습니다. 공식 환영행사와 오페라 공연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었습니다. 1960년대 내내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드골도 중국 국가주석이 방문했을 때 베르사유에서 만찬을 열었고요.
만찬 메뉴는 루이 14세 시절 국왕이 먹던 음식을 참고했습니다. 전채요리와 수프에서 시작해 육류, 생선, 채소요리를 거친 뒤 디저트까지 이어진 코스였죠. 음식 가짓수는 60개에 달했습니다. 다양하고 화려한 요리들은 절대왕정 시절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시진핑이 프랑스에서 받은 대접은 이례적이었습니다. 중국 정상의 방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보였죠. 프랑스가 거둔 성과도 기대만큼 컸습니다. 180억 유로, 약 23조 원의 계약이 체결됐죠.
카트린 페가르(베르사유 궁 박물관장):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베르사유의 이미지를 되살리려고 했어요. 프랑스의 문화를 상징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요.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의 외교적 자산입니다. 올랑드는 시진핑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싶어 했고 그래서 베르사유 궁을 선택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시진핑도 아주 흡족해했습니다. 그래서 유럽 순방 일정 중에 가장 마음에 든 게 베르사유 방문이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최고의 성과를 얻은 것입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빈을 이렇게 접대하는 건 프랑스 정부의 전통이기도 합니다. 1992년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프랑스 대통령은 과거의 외교적 실수를 만회하려고 이곳을 활용했습니다. 1991년 보리스 옐친이 프랑스를 방문했는데 프랑스 정부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이 될 거라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92년 옐친이 다시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는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인 그랑트리아농에서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당시 뉴스: 지난해 4월 보리스 옐친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엘리제 궁에서 서둘러 열린 만찬이 원인이었다는 소문이 있죠. 이후 옐친은 러시아 대통령이 됐고 이제 프랑스 정부는 공항에 의장대를 보내고 대통령과 주요 장관들도 영접을 나갔습니다.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며 엄숙히 권위를 인정한 것입니다. 옐친 부부가 사흘간의 프랑스 방문을 즐겁게 소화해주기를 바란 것이죠. 오늘은 베르사유 궁에서 화려한 대규모 만찬이 열립니다.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가 프랑스 왕과 만찬을 하죠.
미테랑과 올랑드는 프랑스 정부의 오랜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베르사유궁 접대는 국빈한테 큰 경의를 표한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베르사유궁은 국빈을 환영하는 리셉션과 만찬에 여러 차례 쓰였습니다. 팔레비(Pahlavi) 이란 국왕 부부의 베르사유 방문은 우아한 왕비의 자태가 세간의 화제였죠. 네덜란드 여왕 부부의 방문에 동행한 이레네 공주의 방문 역시 베르사유에서 매력을 뽐냈습니다.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는 세계 최장수 왕조의 대표로 베르사유궁을 방문했죠.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은 1차 석유파동이 시작되던 무렵 왕자들과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베르사유에 온 왕족들은 자기 집에 온 것처럼 풍경에 녹아들었죠. 왕족이 없는 프랑스에서는 보기 힘든 화려함도 과시했습니다. 일종의 매력공세였죠. 모두가 계산된 외교적 전술이었습니다. 방문 횟수가 가장 많은 왕족은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3번 방문했죠. 첫 방문 당시인 1948년에는 공주 신분이었습니다. 필립 공과 결혼한 지 겨우 6개월이 지났을 때였죠. 공주가 방문한 영연방 바깥 최초의 국가였습니다. 덕분에 프랑스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 왕족이 됐고 시민들은 열렬하게 공주를 환영했죠.
1957년 4월에는 젊은 여왕이 되어 베르사유 궁전을 다시 방문했습니다. 리셉션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했죠. 수에즈 분쟁에서 함께 싸우다 패배한 양국,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소련의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패배의 기억은 꽤나 쓰라렸습니다. 프랑스는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영국 여왕의 베르사유 방문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3번째 방문은 1972년, 여왕은 46살이었고 양국은 이 방문으로 외교적 난제를 마무리합니다.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2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해 좌절됐던 영국의 유럽공동체 가입이 성사된 것입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인 퐁피두 앞에서 여왕은 양국의 영원한 우정을 완벽한 프랑스어로 선서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이번에도 국빈 방문의 하이라이트였고 다시 한번 역사에 길이 남을 장면을 제공했습니다.
베르사유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왕궁이 아닙니다. 건축적으로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공간을 조직해낸 방식이 남다릅니다. 이 공간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갑니다. 그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주고 감탄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루이 14세의 방, 왕의 아파르트망입니다. 거대한 방들이 이어집니다.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금박을 입힌 나무세공, 화려한 그림과 부조, 청동상, 흉상, 태피스트리가 안을 채우고 있습니다.
값비싼 건축 자재와 미술품으로 관객의 얼을 빼고 무릎을 꿇리겠다는 뜻입니다. 덕분에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베르사유 궁전의 웅장함은 그대로죠. 화려한 장식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닙니다. 루이 14세와 재상인 콜베르가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세밀히 계획한 결과물이죠.
대표적인 예가 화려함으로 유명한 거울의 방입니다. 루이 14세는 종종 이곳에 높다랗게 왕좌를 설치하고 외교사절을 만났죠. 루이 14세 시절은 프랑스 왕정의 전성기였습니다. 태양왕 루이는 절대권력을 뽐내며 적들을 짓밟으려고 했죠.
당시 프랑스의 최대 적은 독일이었습니다. 루이 14세는 여러 차례 독일군을 물리치며 고통을 안겨주었죠. 독일은 이 시절 프랑스에 아픈 기억이 많았습니다. 200년 후 독일은 베르사유에서 그때의 아픔을 갚았죠.
거울의 방은 프랑스와 독일의 역사가 여러 차례 엇갈렸던 장소입니다. 1870년 프랑스 군을 무찌른 프로이센 군은 베르사유를 점령했습니다.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가 엄숙하게 독일 제국을 선포한 곳이 바로 거울의 방입니다. 프랑스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곳에서 프랑스에게 굴욕감을 안긴 것이죠.
프랑스와 독일의 재대결은 1919년 똑같은 곳에서 벌어집니다. 1차 대전을 마무리지은 베르사유 조약도 여기서 조인됐죠. 프랑스가 독일에 가한 복수였습니다. 프랑스는 가혹한 평화조약을 독일에 강요했죠. 역사는 실제로 돌고 돌았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다시 한번 강력해진 프랑스를 상징하게 됐죠.
프랑스인들은 궁전 앞에서 환호하며 복수의 쾌감에 젖었습니다. 그 무렵 베를린의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의 혹독함에 분개했죠.
위베르 베드린(전 프랑스 외무장관): “돌아보면 프랑스의 선택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1차대전은 그렇게 마무리하는 게 아니었어요. 2차대전은 상황이 달랐죠. 1차대전의 끝은 그저 화려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처리하면 안 되는 일이었어요. 패전국이지만 독일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는 거였죠.”
20년 후 나치 독일은 다시 프랑스에 복수를 합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죠. 르브룅 프랑스 대통령과 영국왕 조지 6세는 거울의 방에서 독일에 대한 반격을 약속합니다.
영국 국왕은 르브룅 대통령과 나란히 왕좌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국왕은 1918년부터 입어온 카키색 군복을 입었죠. 군복을 입은 영국 왕의 실루엣에서는 부친인 조지 5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군대 사열은 샹젤리제에서 거행하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때는 베르사유궁 앞에서 거행됐죠. 저항의지가 강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베르사유는 독일과의 갈등을 상징하는 곳이었으니까요.
베르사유는 프랑스 정부의 비밀 무기입니다. 이례적인 연출이 필요할 때만 사용하는 무기죠. 베르사유 궁전이 이런 지위를 얻은 건 1958년 샤를 드골이 권좌로 복귀하면서부터였습니다.
1960년 4월엔 소련 공산당 제1서기 니키타 흐루쇼프(Ники́та Серге́евич Хрущёв)가 베르사유에 왔죠. 스탈린의 후계자가 태양왕의 궁전에 온 것이었습니다. 냉전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라 더 놀라운 사건이었죠. 드골은 국제사회의 긴장을 완화시켜 유럽을 대서양 연안에서 우랄산맥가지로 넓히고 싶어 했습니다. 드골이 베르사유를 외교 무기로 본격 활용하기 시작한 건 이듬해부터였죠.
발레리 쥐스카르 데스탱(전 프랑스 대통령): “베르사유궁을 훌륭하게 활용한 대표적인 예를 말해볼까요. 샤를 드골 대통령 재임 중에 있었던 케네디 미국 대통령 후보의 방문이 그랬죠.”
프랑스계 조상을 둔 재클린 케네디는 왕족 같은 모습으로 도착했고 프랑스 대중은 곧바로 사랑에 빠졌죠.
미 대통령은 프랑스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방문합니다. 현안을 논의하기에 앞서 케네디는 화려했던 과거를 돌아봤죠. 미 합중국 건국보다도 먼 과거입니다. 케네디 부인의 프랑스계 혈통에도 다시 한 번 감탄했을 겁니다. 세계 최고의 리셉션장을 만들어낸 루이 14세도 자부심을 느낄 만하죠.
케네디의 프랑스 방문은 대내외적으로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알제리 전쟁, 프랑스의 핵무기 개발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은 서서히 잊혔죠. 재클린 케네디는 남편의 존재감마저 흐리게 만들며 프랑스 방문의 스타가 됩니다. 개인적 매력이 정치적 문제들을 누른 것이죠.
존 F. 케네디: “여러분께 제 소개를 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재클린 케네디를 따라 파리에 다녀온 사람입니다. 즐거운 방문이었죠(I do not think it altogether inappropriate to introduce myself to this audience. I am the man who accompanied Jacqueline Kennedy to Paris, and I have enjoyed it).”
미 대통령 부부의 프랑스 방문은 대 성공이었습니다. 16년 후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그 방문을 재현하고 싶었죠. “저도 재임 당시 베르사유에 손님들을 초대했어요. 카터 미 대통령도 그중 하나였죠. 해마다 열리는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 행사에 지미 카터 부부를 초대했습니다. 메인 행사였던 만찬은 아주 큰 규모로 열었어요. 4000명을 초대했습니다. 초대형 만찬이었죠.”
이번 만찬은 공화국 수립 후 베르사유 궁전에서 열린 환영행사들 중에서도 최대급 규모였습니다. 4천 명 이상이 왕궁의 만찬장들을 가득 메웠죠. 거울의 방의 분위기는 루이 14세 시절을 연상시켰습니다. 만찬객들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입구로 만찬장에 들어갔죠. 하지만 리셉션 공간을 확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국 대통령이 박수를 받으며 거울의 방을 가로지르는 걸 만찬 참석자들은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지미 카터를 환영하는 만찬에는 파리 사교계 유명인사들, 주요 정부 관리들, 대표적인 프랑스 기업인들, 가수 린 르노, 배우 알랭 들롱 같은 연예인들이 총 출동 했습니다. 손님들로 가득찬 만찬장은 먼 옛날 프랑스 국왕이 왕족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자신의 거처를 개방했을 때를 연상시켰죠. 베르사유 궁전은 루이 14세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작곡가들과 화가들이 칭송해 마지 않았던 곳입니다. 한 작가는 이렇게 썼죠. ‘이 정원을 보면 누구나 왕이 된다’ 베르사유 궁전처럼 화려한 건축물을 지으려면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과감함과 재력이 필수적이죠.
태양왕 루이 14세는 절대권력의 상징으로 궁전을 지었습니다. 정권 교체나 혁명에도 끄떡없을 권력이었죠. 프랑스의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고 싶어했던 드골은 베르사유의 후광을 이용했습니다. 케네디 부부 환영만찬은 드골의 계산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줬죠. 그래서 드골은 이곳에 국빈용 숙소를 조성하기로 합니다.
베르사유 궁은 현대 국가 정상들이 묵기 좋은 곳은 아니었죠. 사생활 보장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루이 14세는 모든 걸 드러낸 채로 살았습니다. 궁정신하들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저울질했죠.
왕의 그랑아파르트망을 숙소로 바꾸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드골은 부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여름용 별궁 그랑트리아농을 선택했죠.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대규모 보수공사가 필요했습니다.
파비앙 오페르망(역사학자): “베르사유의 그랑트리아농을 국빈용 숙소로 조성하겠다는 결정이 나오자마자 복원과 보수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손대지 않고 그냥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어요. 바닥, 마루, 목세공품, 문과 창문, 목재 부분들도 수리했죠. 전기 배선도 하고 전화도 놓고 안에서 파티를 열고 숙박을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드골은 충격요법에 베르사유 궁전을 쓰고 싶어했죠. 보수 작업 규모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술자와 인부 350명이 3년 이상 보수 공사에 매달렸죠.
카트린 페가르(베르사유 궁 박물관장): “공사 후 그랑트리아농이 처음 공개된 건 1966년이었는데 진짜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바뀐 걸 보고 다들 놀랐죠. 루이 14세 시대의 예술품, 가구, 양탄자 같은 것들은 그대로 남기면서도 현대적인 숙박시설로 거듭났으니까요. 최신 주방시설을 설치했어요. 상하수도 시설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내부 온도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어요. 1960년대에 그런 걸 해낸 겁니다.” 베르사유궁 박물관장 카트린 페가르
이제 그랑트리아농은 국빈용 숙소로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케 해주는 방은 곳곳에 남아있죠.
카트린 페가르(베르사유 궁 박물관장): “그랑트리아농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에요. 이 방들에는 국빈을 수행하고 온 외국 손님들이 묵었죠. 프랑스 제5공화국 즉 드골 시대에 파리를 방문한 국빈이요. 요즘은 아무도 쓰지 않아서 비어있는데 드골이 그랑트리아농을 국빈용 숙소로 바꾸었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습니다.”
보수 공사가 과하게 진행된 곳도 있었죠. 마리 루이즈 황후의 방이 대표적입니다. 외국 정상부부의 침실로 호화롭게 개조했지만 사용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카트린 페가르(베르사유 궁 박물관장): “원래 계획은 외국 정상의 부부 침실로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사용된 건 한 번, 1975년 이란국왕 부부가 방문했을 때뿐이었어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은 거부했죠. 나폴레옹의 침대를 가져갔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네, 키 작은 황제였죠. 원래 이 방은 여러 시대가 뒤섞여 있었어요. 루이 14세 시절에는 휴일에 사용하려고 친근한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샤를 드골도 그런 분위기를 바랐던 것 같아요. 외국 정상들에게 친밀한 느낌을 주고 싶어했죠. 엘리자 궁에서는 보다 격식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베르사유 궁에서는 호화롭고 친밀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거예요. 오페라 공연도 그래서 넣었겠죠.”
드골이 국빈들에게 제공한 그랑트리아농은 베르사유궁에서도 가장 특별한 곳입니다. 궁전 다른 곳에선 불가능한 사생활을 즐길 수 있죠. 그랑트리아농과 쁘띠트리아농 두 별궁 부근엔 오두막집, 정자가 정원과 어우러져 있습니다. 대궁전의 압도적인 느낌이 없죠. 그림같은 촌락의 풍경도 펼쳐집니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만들어낸 촌락이죠. 자유분방하고 변덕이 심한 18살 왕비에게 쁘띠트리아농은 엄격한 궁정생활의 도피처였습니다. 궁중예법을 따를 필요가 없고 마음껏 변덕을 부릴 수 있는 곳이었죠.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던 마리 앙뜨와네뜨는 의혹과 중상모략에 시달렸습니다. 궁정신하들은 분개했죠.
장 자크 아야공(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전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왕과 여왕이 실제로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왕족들은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생활을 갈망했을 거라고요. 루이 14세가 바랐던 왕정은 국왕을 벌집의 여왕벌처럼 만들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왕정이 유지될 수가 없었죠. 국왕은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는 사람이었어요. 국가의 모든 일이 국왕 한 사람한테 귀결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마리 앙뜨와네뜨의 별궁 쁘띠트리아농은 자유와 평범한 삶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죠. 드골은 트리아농의 매력에 푹 빠진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랑트리아농의 동쪽을 직접 사용하기도 했죠. 드골은 부부 침실을 만들었습니다. 2미터가 넘는 장신이어서 침대는 특별주문했죠. 집무실도 여럿이었습니다. 엘리제 궁처럼 집무실을 배치에 베르사유에 머물 때도 정부 운영에 문제가 없게 했죠.
카트린 페가르(베르사유 궁 박물관장): “드골 대통령은 이런 곳이 어떤 이미지를 전달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베르사유 궁을 선택했죠. 외국 정상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는 베르사유 궁이 아주 좋았어요. 지금도 변한 건 없습니다. 국빈들은 여전히 베르사유 방문을 바라죠. 드골의 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드골 대통령의 업적은 이것 같아요. 외국 정상들의 바람을 간파해내고 베르사유 궁으로 초청해 그런 바람을 실현시켜 준 것이요.”
드골은 보수공사의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했습니다. 드골 재임시절 트리아농에 묵은 외국 정상은 1969년 3월 닉슨 미 대통령뿐이었죠. 드골 재임기의 마지막 대규모 외교행사였습니다. 새로 선출된 미국 대통령과 임기 종료를 앞둔 프랑스 대통령의 만남이었죠. 몇 개월 후 드골은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화려한 새 관저는 후임 대통령에게 넘어갔죠. 데스탱은 기거이 드골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이번 방문객은 마음껏 권력 을 휘두르고 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부부였죠.
이란 국왕 부부의 프랑스 방문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드골 시대에도 데스탱 시대에도 중동의 송유관에는 막대한 양의 석유가 흘렀고 이란의 영향력은 크게 늘어났습니다. 거울의 방 뒤로 펼쳐진 거대한 연못 주위를 돌며 이 화려함을 연출해낸 데스탱 정부는 외쳤을 겁니다. '루이 14세, 감사합니다!'
네, 이번에도 루이 14세입니다. 베르사유 궁에서 야간 행사를 열어 왕실 선전의 최대 무기로 활용한 사람이 루이 14세였죠.
라파엘 마송(베르사유 궁 박물관 수석학예사): “베르사유 궁전에서 첫 번째 파티를 열었을 때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궁의 화려함을 과시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대규모 파티를 연 다음에는 상세하게 기록을 하게 했어요. 판화로도 제작하도록 지시했죠. 화려한 대규모 파티와 축제들을 널리 알려서 프랑스 왕실을 선전하는 데 이용했던 겁니다. 판화와 선전문을 외교관의 가방에 넣어서 해외에 보내기도 했어요. 다른 나라 국왕들이나 주요 인사들한테 선물로 보내줬던 거죠.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강했습니다. 왕궁 파티를 묘사한 글과 그림은 그 수단 중 하나였죠.”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가 조성한 정원은 베르사유 궁에서 제일 연약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치밀한 보존 덕분에 거의 본모습 그대로 살아남았죠. 정원 역시 방문객의 감탄을 자아내게 설계됐습니다. 루이 14세도 정원설계에 직접 참여했죠. 루이 14세 시절 이 정원은 유럽 왕과 고관대작의 필수관람 코스였습니다. 그 전통은 현대에도 이어졌죠. 가마 대신 리무진을 탄다는 점만 달라졌습니다.
1970년대 트리아농에서는 파티가 자주 열렸죠. 파티는 모두 엇비슷했습니다. 국빈들이 방문한 곳도 똑같았죠. 국빈의 방문은 정부의 권위를 상기시켜 줍니다. 덕분에 프랑스 정부는 갖가지 위기를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죠.
1980년 벽두는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로 시작됐습니다. 베르사유는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모으는 임무를 맡았죠.
당시 뉴스: 경제정상회의 참석자는 모두 서방의 경제상황이 심각하다고 말합니다. 경기후퇴 분위기는 강하고 실업률은 높고 경제성장속도는 느립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을 논의하는 자리엔 궁색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죠. 베르사유 궁전은 300년 전의 웅장함과 사치가 남긴 유산입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국가재정을 자신의 호주머니로 생각했죠.
1982년 프랑스 신임 대통령 미테랑은 G7정상회의를 베르사유에서 개최해 선진국들의 경제문제를 논의하기로 합니다.
위베르 베드린(전 프랑스 외무장관): “베르사유가 회장으로 결정되자 각국 언론은 다양한 반응을 내놓았습니다. 프랑스를 걱정하기도 하고 회의 유치를 칭찬하기도 했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언론도 적지 않았고요. ‘베르사유 궁전이라면 더없이 좋지’ ‘루이 14세 궁전이라고? 반응은 분분하겠지만 잘 결정했어’ ‘프랑스가 너무 나서는 거 아냐?’ 독일 언론은 위대한 국가라는 표현을 많이 썼죠. ‘프랑스는 자기들이 다시 위대한 국가가 된 줄 알아’라고 했어요.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를 보는 눈은 늘 그랬습니다. 애정, 호기심, 질투가 섞여 있죠.”
당시 뉴스: 프랑스 왕들이 지은 왕궁에서 사회당 대통령이 정상회의를 엽니다. 하지만 경제정상회의는 현대를 통틀어서도 가장 화려하고 눈길을 끄는 정상들의 회의가 될 것입니다. 프랑스는 이번 정상회의에 돈을 얼마나 쓸까요? 천만 달러(약100억 원)라는 사람, 그 이상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랑스 정부가 구체적인 수치를 밝힌 적은 없죠. 한 정부관리는 '손님을 만찬에 초대하며 비용을 밝히는 법은 없다'고 했습니다.
프랑수아 미테랑(프랑스 대통령): 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인들은 ;공화국답지 않다'고 말했답니다.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파리 시민들도 찾았던 곳입니다. 단순히 왕의 재산이 아니었어요. 정상들의 회의는 다른 시대에도 열렸습니다. 게다가 베르사유 궁전은 오래 전부터 프랑스 공화국의 자산이었습니다. 왕국이 아닌 공화국은 어째서 예술과 역사가 살아있고 안락하기까지 한 곳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좌파 연합정부 시절이었습니다. 공산당 장관들도 있었고요. 하지만 베르사유로 미국 대통령, 대처 영국 총리 등을 초대했죠. 미테랑의 결정에 어느 정도 반발이 오는 건 당연했습니다.
미테랑은 G7 정상회의를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이끌었죠. 미테랑은 큰그림을 봤고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스파돌리니 총리, 서독의 슈미트 총리, 일본의 스즈키 총리도 참석했죠. 캐나다 총리 피에르 트뤼도는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할리우드 출신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왔죠.
베르사유 궁전을 외교 무대로 활용하는 걸 모든 시민이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일반인의 베르사유 궁전 관람은 2주간 중단됐습니다. 관광객이 주고객인 부근 가게 주인들은 1789년 궁전으로 쳐들어가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체포한 프랑스 혁명가들처럼 분개했죠. 가게 주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경제문제를 풀고 싶으면 경제 회의를 다른 곳에서 하라'고요.
하지만 베르사유 궁전은 다시 한번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G7 정상회의는 성공을 거뒀죠. 미테랑은 궁정 곳곳을 멋지게 활용했습니다. 역사적 상징들도 잘 활용했죠. 외교무대에서 가치중립적인 이미지는 없습니다. 같은 대상을 볼 때도 각국의 시각은 다르죠.
당시 뉴스: 프랑수아 미테랑 앞에는 유명 회화작품 두 점이 걸립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와 미테랑의 왼쪽에 걸릴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인데 미테랑 뒤에 걸릴 이 두 작품의 맞은편에는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앉게 됩니다. 꼼짝없이 48시간 동안 나폴레옹을 봐야 할 처지가 된 거죠.
왕정 시절 왕궁파티는 왕 마음대로였을 겁니다. 미테랑도 손님들한테 자신의 취향을 강요했죠. 왕의 예배당에서 중세 민요 공연을 열었습니다. 외국손님들의 표정은 꽤 당혹스러워 보였죠.
정치기술자처럼 미테랑은 베르사유 궁 G7회의를 이용해 프랑스 내부에서 자신의 입지를 한층 더 다졌습니다. 궁정 스타일로 손님들을 접대하면서 절대 화면 중심에서 벗어나지 않았죠. 루이 14세가 착안한 손님 접대법은 수백 년 후 이렇게 부활합니다. 베르사유 궁의 유령들도 이후로는 편히 잠들었겠죠?
파비앙 오페르망(역사학자): “미테랑 이후 베르사유 궁전은 권력을 상징하는 곳의 이미지를 많이 잃었습니다. 후임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시라크와 사르코지는 이곳에서 공식만찬이나 리셉션을 열지 않았죠. 외국정상들의 방문은 몇 차례 있었습니다. 리비아의 카다피가 대표적이죠. 하지만 공식 방문이 아니라 개인적인 방문이었고 취재진만 구름처럼 몰렸어요. 카다피를 맞이한 것도 베르사유 궁 관장인 장 자크 아야공이었지 프랑스 대통령이 아니었습니다.”
카다피의 프랑스 방문을 둘러싸고 프랑스에선 논쟁이 벌어졌죠. 테러리스트 출신 독재자 카다피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는 텐트. 파리에서는 엘리제 궁 바로 맞은편에 텐트를 쳤습니다.
베르사유 궁은 파리 방문 일정 중 제일 놀라운 부분이었죠. 이날 카다피는 복장부터 특이했습니다. 사냥꾼 같은 차림새였죠. 독재자는 300여 년 전 절대권력을 휘두른 루이 14세의 왕좌 앞에서 경의도 표했습니다. 이로부터 약 4년 후 카다피는 내전으로 권좌에서 쫓겨났고 시민군의 총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라고 세상은 말했죠.
베르사유 궁도 외교 무대에서 거의 퇴장합니다. 요즘도 야간에 축제 같은 게 열려 외교관이나 유명인사들이 방문하는 경우는 가끔 있죠. 해가 뜨면 베르사유 궁은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루이 14세의 궁전은 이제 세계적인 관광지입니다. 베르사유의 화려한 건물들과 아름다운 정원을 찾아 세계 각국에서 모여드는 관광객은 수백만 명이죠.
베르사유 궁은 프랑스의 상징을 넘어 인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해마다 이곳에서는 현대미술작품도 전시되죠. 압도적인 규모와 정제된 궁전의 외관에 파문을 던지는 작품들입니다. 현대미술작품들은 300년을 살아남은 궁전에 경의를 표하죠.
아니쉬 카푸어(조각가): “베르사유의 역사는 매순간 이곳에 살아있습니다. 그렇죠? 이곳에서는 모든 게 하나의 시각으로 수렴되는 게 감지됩니다. 권력의 구심성이 모든 곳에 녹아있죠. 제가 이곳에서 작업하며 어려웠떤 점 중 하나는 '현대의 민주적인 세계가 모든 게 하나의 시각으로 수렴되는 구심성을 어떻게 다시 보도록 만들 것인가?'라는 고민이었죠.”
베르사유 궁전은 시간을 가로지르는 인류의 기념비가 됐습니다. 루이 14세는 국가가 위엄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현대의 프랑스 대통령들은 그 생각에 공감했죠.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베르사유 궁은 민주공화국으로 바뀐 프랑스에서도 국가의 상징으로 남았고 이제는 전 세계에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매력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죠.
참고자료
베르사유궁을 사랑한 왕과 대통령 (VERSAILLES, Rois, Princesses et Présidents), Frédéric Biamonti, 2015
en.chateauversailles.fr
anishkapoor.com/1032/chateau-de-versailles-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