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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전인 10세기 경에 이미 신대륙을 발견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이킹입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근거지로 했던 바이킹은 고향인 노르웨이를 떠나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이후 그린란드를 거쳐 북대서양을 지나 오늘날 캐나다의 래브라도 해안에 도착한 후 뉴펀들랜드 섬을 발견했습니다. 실제 이들의 야영지 흔적이 지금도 뉴펀들랜드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서 오늘날 미국의 메인 주에 해당하는 지역까지 이동했습니다.
바이킹은 일찍이 먼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았는데 그중 가장 놀라운 일은 대규모의 대구 떼를 발견한 일이었습니다. 이 대구 떼를 따라 북미로 몇 차례나 항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거쳐 캐나다의 해안까지 바이킹의 이동 경로와 북대서양 대구 서식지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바이킹의 항해로는 정확히 대서양산 대구의 영역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대구 서식지를 따라 바다 위에 길이 만들어졌고 대구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북유럽에서 뉴펀들랜드까지의 긴 항해를 가능케 했던 것은 대구 덕분이었습니다. 대구는 큰 생선이어서 한 마리만 잡아도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컸습니다. 흰살 생선으로 지방 함량이 낮아 맛이 담백하고 저장성이 높았죠. 성질도 유순해서 비교적 잡기도 쉬운 면이 있기는 했지만 길이가 1미터 이상인 데다 무게가 80~100킬로그램에 육박한다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바이킹들은 진작부터 북유럽의 바다에서 대구를 잡아 주요 단백질 자원으로 삼았고 대구가 나지 않는 여름철에는 겨울철에 미리 대구를 바람에 말려 무게를 줄인 후 두꺼운 나무판자처럼 만들어 긴 항해 기간 동안 식량으로 사용했습니다. 실제 9세기 경 바이킹족은 이미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에 말린 대구를 가공하기 위한 공장을 세웠고 북유럽으로 수출까지 했다고 합니다.
바이킹에 이어서 등장하는 용감한 어부들이 바스크인들입니다. 바스크인은 에스파냐의 북서부와 프랑스 남부의 산악 지역에 사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입니다. 사실 바스크인들은 그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입니다. 이들은 바스크 베레모라고 불리는 자기만의 모자를 가지고 있고 자기들만의 문화가 담긴 옷차림도 남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바스크인들을 뺨이 불그레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확실한 건 민족의 기원 자체가 여전히 수수께끼라는 점입니다.
바스크인들은 기본적으로 뱃사람들로 연안에서 고래잡이를 주로 했었습니다. 하지만 연안에서 고래 개체 수가 급감하자 더 먼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일찍부터 먼 바다로 나가 생선을 잡아 유럽에 공급했습니다. 주로 고래잡이로 명성을 날렸던 바스크인은 고래 떼를 쫓는 과정에서 엄청난 대구 떼를 발견하면서 바이킹의 뒤를 이어 대구 공급의 최전선에 나섰습니다.
특히 바스크인들은 예로부터 좋은 천일염전을 보유하고 있던 이베리아 반도 출신을 살려 대구를 소금에 절여 유통시켰습니다. 이 염장 대구는 놀랄 만큼 오래 보존되었고 물에 복원시키면 맛도 살아났습니다. 유럽인들은 이 담백한 흰살 생선에 매료됐습니다. 당시 유럽인의 금육일은 염장 대구를 먹는 날이었고, 따라서 염장 대구는 종교적인 숭배물이 되어갔습니다.
염장 대구는 바스크인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고 그들은 여러 세기에 걸쳐 강력한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염장 대구를 프랑스에서는 ‘모뤼’. 에스파냐에서는 ‘바깔라오’, 이탈리아에서는 ‘바깔라’, 포르투갈에서는 ‘바깔라우’라고 불리며 지금도 이들 지역에서 인기 있는 음식입니다. 특히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의 염장 대구는 죽기 전에 꼭 먹어야 할 100대 음식에 꼽히고 신대륙 발견과 함께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로 전해진 바깔라우는 여전히 인기 있는 메뉴로 남아있습니다.
바스크 지방의 대표적인 대구 요리는 올리브유를 이용해서 만드는 필필(Pil Pil)이라는 요리입니다. 이 요리는 대구가 가지고 있는 체내 기름과 올리브유가 만나면서 젤리 형태로 변합니다. 접시에 담기 전에는 48시간 동안 절인 피망 소스를 살짝 뿌려줍니다. 바스크 사람들이 즐겨 먹는 이 요리의 특징은 주재료인 대구의 맛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점입니다. 이 소박한 요리 속에 바스크인들의 정신이 그대로 살아있습니다.
그러나 바스크인들이 대구의 출처에 대해 엄격히 함구했기 때문에 대구 어장의 위치는 수 세기에 걸쳐 그들만의 비밀이었습니다. 바스크인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질시의 대상이 됐죠. 특히 영국 브리스틀 항구의 상인들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위세를 떨치던 한자동맹이 아이슬란드산 말린 대구의 중요 교역항이었던 브리스틀 항구의 상인들이 아이슬란드산 말린 대구를 구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브리스틀 상인들의 실질적인 자금 지원과 영국 국왕 헨리 7세의 후원으로 1497년 이탈리아인 존 캐보트(John Cabot)가 아시아 항로를 발견하겠다고 나섰고 캐보트는 항해한 지 35일 만에 발견한 거대한 바위투성이의 해변을 뉴펀들랜드(New Found Land)라고 명명했습니다. 영국에 귀환한 캐보트는 새로 발견한 땅의 바다에는 양동이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 떼가 우글거린다고 보고했습니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인 1534년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가 뉴펀들랜드에 도착해 그곳을 프랑스 땅으로 선언하며 바스크인들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그 지역에서 1000여 척의 바스크 어선이 대구 조업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뉴펀들랜드에 최적의 대구 어장이 형성된 이유는 동남쪽에 있는 그랜드뱅크스 대륙붕 때문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래브라도 해류와 멕시코 만류가 만나 세계 최대의 어장을 이룹니다.
이후 유럽 여러 나라들이 뉴펀들랜드의 대구잡이에 뛰어들었습니다. 1508년 포르투갈에서 팔리는 물고기의 10퍼센트가 염장한 뉴펀들랜드산 대구였으나 1550년대에는 유럽에서 먹는 생선의 60퍼센트가 대구가 됐습니다.
바스크 사람들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구라는 물고기, 그들의 역사를 바꾼 이 중요한 물고기는 이제 바스크인들이 아닌 아이슬란드인들이 잡고 있습니다.
황금 물고기 대구의 길을 찾아 나선 길 이제 아이슬란드로 갑니다. 아이슬란드는 화산암으로 뒤덮인 섬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만에는 항구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거칠고 척박한 아이슬란드는 오로지 어업만이 경제의 기본인 나라입니다. 그중에서도 대구잡이를 빼놓고는 아이슬란드를 말할 수 없습니다.
황량한 섬 아이슬란드는 오랫동안 북아메리카나 북유럽보다 훨씬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나가 추운 바다에서 대구를 잡으며 살아왔습니다. 자연이 거칠어 척박한 아이슬란드에 대구는 몇 안 되는 소중한 천연자원입니다. 화산과 빙하가 도처에 널려있고 기후까지 혹독한 황량한 섬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대구라는 생선은 어떤 의미일까요.
1890년대부터 영국의 현대적인 트롤선들이 아이슬란드의 바다에서 남획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영국 트롤선의 거대한 그물이 아이슬란드 해양경비정이 이끄는 갈고리에 의해 찢어지게 되면서 두 나라는 본격적인 대구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아이슬란드 해안경비대가 영국 해군과 벌인 3차례의 전투. 꽤 위험하고 격렬한 전투였지만 아이슬란드 사람들로서는 주요 식량 공급원인 대구를 잃는 것은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신문마다 그날의 격렬한 전투가 대서특필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자국 어장을 침범하려는 외국인들이 문제의 주범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아이슬란드 정부는 영국과의 국교를 단절하겠다고 강력히 선언함과 동시에 NATO 탈퇴라는 초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러자 즉시 미국과 NATO가 중재에 나섰고 결국 아이슬란드의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선포가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약소국 아이슬란드는 벼랑끝전술로 200해리까지 바다영토를 점차 넓혀갔고 이를 계기로 UN은 1982년부터 전 세계의 바다에 200해리의 배타적 경제수역을 지정하게 됩니다. 대구 전쟁에 참여했던 해양경비정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북구 신화에서 신들의 아버지, 오딘(ODINN)의 이름을 딴 경비정도 치열했던 대구 전쟁의 주역이죠. 오딘은 바이킹 시대의 신 이름입니다. 아이슬란드 해양 경비대의 모든 경비정은 이처럼 오딘, 토리, 발투르 등 신의 이름을 씁니다. 조타실에는 당시 선장이 앉았던 의자도 그대로 있습니다. 거대 트롤선의 그물을 끊은 갈고리도 그 자리에 놓여있습니다. 당시의 패기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아이슬란드 풍경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자연입니다. 아이슬란드에 몇 안되는 천연 자원 중 하나인 대구. 많다고 해서 끝도 없이 잡는다면 어느 순간 더 이상 잡을 대구가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대구가 많이 잡히는 것은 대구가 넘치게 많아서가 아니라 몽땅 잡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걸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거죠. 대구 전쟁을 겪고 그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물고기는 잡는 것 못지 않게 바다에 비축해두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아이슬란드 정부와 어업인 모두 그걸 알고 있는 거죠. 이제 항구로 돌아가기 전에 오늘 어획량을 웹사이트에 기록해야 합니다. 아이슬란드 어부들은 그날그날 잡은 어획량을 바로 정부에 보고해야 합니다. 어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남획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경매가 시작되는데 어부는 돌아가는 상황을 그때그때 확인할 수 있는 거죠.
1984년부터 대구 자원량이 줄어 수산 관리를 위한 쿼터 시스템을 도입하게 됐고 오늘날까지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 쿼터 시스템은 어족 자원을 최적의 규모로 유지하기 위해 과학 연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족 자원이 꾸준히 발달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보다 비록 적은 양을 잡지만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세상을 바꾼 물고기, 대구 생선의 종말 2부”. EBS, 서울. 2018
사피엔스의 식탁: 인류가 선택한 9가지 식품
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3781
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07/20140307039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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